단지 지루했을 뿐이었다- 그 이유였는데에-! 덜컹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마차너머의 산이 멀어진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이빨을 세워 눈앞의 쇠철창을 갉아보기도 하고 발톱을 이용하여 긁어도 보았지만 단단한 우리는 꿈 쩍도 하지 않는다. 젠장! 내가 어쩌다 인간에게 잡혀버린거냐! 안돼!!! "아우우우우우~" 분노의 울부짖음은 애처로운 늑대의 울음소리로 하늘을 물들일 뿐이었다. 공마(貢魔) 세투스라 "소신 테빌란, 폐하를 뵈옵니다." "오오 고개를 들게나." 넙죽 허리를 숙인 상인복장의 남자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후덕한 인상의 왕은 웃음을 보이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간 잘 지냈는가?" "저희 테빌란상회는 나날히 번창해가고 있습니다. 이게 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덕분에.." "허허, 인사치례는 되었네. 그건 그렇고 가져온 물건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저희가 베일 산맥을 지나던 중 잡은 짐승입니다. 절로 감탄이 흘러나오는 동물이지요." 왕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자 상인 테빌란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뒤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밀려들어오는 소리가 알현실을 울리더니 곧 작은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 키잉 ..하고. "이리 들라." 왕의 명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었던 듯 알현실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곧 강철로 이루어진 우리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짙은 검은색의 털과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 작지만 날렵한 몸체와 다리는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의 기품과 매력을 가지고 있는 늑대가 그 우리속에 갇힌 채 끙끙대고 있었다. 늑대의 멋진 모습에 감탄을 내뱉으며 우리속을 유심히 살펴보던 왕이 이상하단 눈빛으로 상인을 바라보자 상인이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그게, 이상하게 왕성에 도착한 이후부터 저렇게 끙끙대고만 있는지라..저희도 원인을 알수가 없습니다." "호오.." 상인의 목소리에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늑대를 바라본다. 그런 왕의 시선이 불쾌했던지 끙끙대던 늑대가 휙 꼬리로 얼굴을 가리며 다리사이로 고개를 파묻는다. "영리한 놈이로군." "아무렴입니까, 저 쭉 뻗은 꼬리는 그야말로 작품이지요." 하지만 왕의 눈은 탐탁치 않다. 보석처럼 빛나는 털과 일개 짐승에게서 볼 수 없는 기품은 그야말로 최상의 동물이지만 끙끙대기만 하는 모양새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가보다. 이런, 글렀군. 상인이 침음성과 삼키며 고개를 들어 늑대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니까. 아쉬운 한숨과 함께 늑대를 가져가기 위해 입을 열려던 상인의 목소리를 막아버린 것은 한 어린 목소리였다. "아바마마~" "오오 제인-" 통통하게 젖살이 오른 발간 볼과 반짝반짝 빛나는 보라빛 눈동자. 그 위에 드리워진 은빛 머리칼은 그야말로 천상의 실과 같이 고운지라 상인의 눈이 멍하니 왕자를 향해 꽂혀졌지만 왕자의 호기심은 이미 그 늑대에게로 쏠려있는 것 같다. 갸웃- 하고, 누군가가 발견하게 된다면 차오르는 감동으로 눈물을 뚝뚝 떨굴만한 포즈로 늑대를 바라보던 왕자가 왕의 무릎에 기대며 웅얼거린다. "..저건 뭐에요?" "허허, 무서워 할 것 없다. 이제 곧 물릴터이니-" "안돼요!" "..응?" 무릎에 바짝 매달리는 왕자가 귀여워 웃음을 보이며 늑대를 가져가라는 손짓을 보이려던 왕의 손 목을 덥썩 잡은 것은 다름아닌 제이닌 왕자. 애칭 제인. 애교섞인 보라색 눈동자로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은 왕자가 귀여운 손가락을 들어 늑대우리를 가르킨다. "저거 저 주세요, 아바마마!" 왕과 상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은 놀라움으로, 상인은 봉을 잡았다는 기쁨으로. "제..제인, 저런 위험한 동물을 네 옆에 둘수가.." "..제인이 갖고싶은데..." 허둥지둥 시선을 돌리며 애써 거절해보려던 왕의 몸짓은 빨간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 한가득 습기를 머금는 왕자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저 눈물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다던 하크란 왕성도 한 방에 무너질것이야. 애써 자신의 무너짐을 달래며 왕자를 들어올려 무릎에 얹은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와 상인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래, 내 너에게 주도록 하마, 대신 위험성을 테스트해본 뒤이다." ..그날로 늑대는 왕자의 것이 되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눈앞에서 알짱대는 흰 볼을 꽉 깨물어 한 입 꿀꺽 하고싶은 맘을 애써 달래며 눈을 감고 있으려니 다시금 인간 꼬마가 알짱거린다. 아오, 이 자식을 그냥 확 먹어버려? 겁도없이 알짱대는 인간 꼬마를 흘낏 붉은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인간 꼬마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히죽, 웃음을 보일 뿐이다. 자신이 이 왕성에 팔려온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내가 어쩌다 이 신세가 되었을까 - 한숨과 함께 앞발에 주둥이를 묻고 눈을 감자 새록새록 떠오르는 몇 주 전의 일. 마계의 최고 권위자이자 순위 넘버 원인 '세투스라'.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는 매혹의 여왕인 베니아조차 홀랑 넘어오게 만든 그의 강력한 무기이자 힘이기도 했다. 그의 넓은 가슴에 안겨보고자 하는 마족이 몇이었으며 싸가지 없는 자신의 성격에 칼을 빼들다가도 그 외모에 숨을 멈추며 조용히 고개숙여보이던 놈이 몇명이었더냐- 물론 자신이 약한것은 절대 아니다. 순수한 마력으로만 따지자면 마황과도 비등바등할 정도이니까.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마황자리를 거절하고 넘버원으로 권력만 누리고 있는 그인지라 지금의 이 상황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고 익숙해져선 안되는 일인것이다. 몇천년을 마계에 처박혀 이녀석 저녀석을 안아오다 그것도 지겨워 져 재미없던 나날을 보내던 중 인간세상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들떴던가. 그래, 인간세상- 중간계. 심심하면 내려가서 깽판치고 돌아와도 되는 만만한 세상! 먹음직스러운 떡이 코앞에 있었는데 난 뭘 하고 있었던걸까!! 결심이 선것은 몇 분, 그리고 결심과 함께 마계를 빠져나온것은 몇 초에 불과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 재수없게 신족녀석들이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둔 함정에 보기좋게 걸려든것이다. 젠장. 인간세계로 나와 한 걸음 내딛자마자 온 몸을 구속하던 결계라니.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그 결계에 저항할틈도 없이 빠져버려 정신을 차리니 이런 늑대의 몸이 되어있었고 - 더 어이가 없는건 마력이 사라진것이다. 아니, 완전히 사라진것은 아니지만 예전 마력에 비하면 '미친-'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만큼 밑바닥만 간신히 채우고 있는 마력. 사라진 마력은 돌아올줄을 모르고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을정도의 마력만이 남아있는 그 어이없는 상황이 기가막혀 하늘만 바라보다 잠이 들었었다. 그래, 잠이 들었다 깨니 그 철창안이더라. 그리고 어영부영 하는 사이 이곳에 팔려왔다 이거지. 제기랄! 이 일은 절대 비밀이다. 무덤까지 가져가야할 비밀인것이다. 이 고귀하신 몸이 인간에게 붙잡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인간 아이에게 시달리고 있어야 하다니 -!!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도라~ 이것 좀 봐! 얼르은~" ..절규를 뚫고 들리는 앵알앵알한 아이의 목소리. 쓰윽 고개를 돌리자 붉은 꽃줄기를 부여잡은 채 생글생글 웃고있는 꼬마가 보인다. ..도라.. 도라... 그게 이 몸의 이름이란다. 하하. 도라... 뭘 돌아? 내가 돌았냐? 그래 돌은것일수도 있겠다. 난 지금 돌은거야, 돌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수가..!! "도라아~ 이것 좀 보라니까" 늑대 하나 미치게 만드는 이름을 지어놓고 잘도 생글거리고 웃는 인간 꼬마가 자꾸만 털끝을 당기며 붉은 꽃을 가르킨다. 머리통을 그냥 씹어먹어버릴까, 제기랄! 솟구치는 분노를 콧김으로 내뿜으며 홱 고개를 돌리자 붉디 붉은 빛을 가진 꽃 아래를 손가락으로 파헤치던 인간 꼬마가 베시시 웃음을 보인다. 곱게 접혀지는 보라색 눈동자와 은빛 머리카락이 그런대로 어울렸기에 이런 미색이 인간계에도 있었나~ 하는 묘한 생각과 함께 고개를 숙이자 흙투성이의 작은 손가락 사이로 꽃의 뿌리가 보인다. ..어라? 순간 꼬마의 손가락을 주둥이 끝으로 치워버리고 이빨로 꽃의 뿌리부근을 잡아 끄집어 내었더니 두둑한 두께의 무언가가 슬슬 딸려 올라온다. "어어? 도라, 하지마! 꽃 끊어진단 말이야~" 그 모양을 보고있던 인간 꼬마가 작은 손으로 등줄기를 때리며 말리고 있지만 내가 멈출 것 같더냐? 지금 무척 중요한걸 발견했는데! 완전히 뽑혀나온 꽃줄기를 땅에 뱉고는 앞발로 문지르자 지저분하게 붙어있던 흙덩이가 이리저리 떨어져 나가더니 곧 완연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심봤다. 마계에서나 자라는 꽃이다! 한 입이면 마력의 절반을 회복시켜주는 마령초!! 이게 이런 후줄근한 궁성 안뜰에서 자라고 있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경악에 가득차 입을 떡 벌린 채 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등 두들기는 것을 멈춘 인간 꼬마가 꼼지락꼼지락 품에 파고들고는 꽃을 만지작거린다. 어허, 부정탄다 인간꼬마. 앞발로 꼬마를 슬쩍 밀어버리고는 꽃을 물어 씹자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상쾌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 아아 마령초다 마령초. 나의 구원자야. "도라아~ 그런거 먹으면 큰일나, 지지!" 우적우적 마령초를 씹고 있으려니 콩알만한 인간 꼬마가 알짱거리며 아래위로 움직이는 턱을 움켜쥐고는 기껏 삼킨 마령초를 뱉어내게 하기 위해 손을 집어넣는다. 아니, 이 인간 꼬마가 미쳤나? 어디다가 손을 집어넣고 난리야? 인간 꼬마의 손이 이빨을 뚫고 들어오기전 꿀꺽- 마령초를 삼킨 후 머리를 흔들자 자그마한 팔이 휙하니 튕겨져 나온다. 이 인간 꼬마. 아무리 봐도 제정신인 꼬마가 아니다. 뭘 믿고 늑대 주둥아리에 손을 집어넣는단 말이냐. 떨구어져 나간 손을 옷에 쓰윽쓰윽 문지르며 다시 다가오는 꼬마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꼬마가 제딴에는 엄한 얼굴을 한 채 손을 들어 훈계한다. "그런거 먹으면 배가 아야해! 큰일난단 말이야!" 이미 먹은걸 어쩌라고? 그리고 내 배가 너랑 같냐? 마령초 먹고 아야하게? 웃긴 인간 꼬마의 말을 무시하고는 고개를 앞발에 파묻자 히잉-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조차 무시하고 두 눈을 감자 귀를 털어내자 잠시 조용히 주변이 가라앉는다. 뭔가 이상하다. "흐..흐..흐아아아앙!!" 그러면 그렇지!! 울었다!! 울었어!! 고요하게 가라앉는 공기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인간 꼬마가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저 꼬마, 울음소리 하나는 살인적이라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인간 꼬마들이 이렇게 강력할줄은 미처 몰랐었다, 정말로. 야 인간꼬마! 그만 울어! 그만 울라고! 귀를 찌르듯 울리는 큰 울음소리에 주둥이를 들어 인간 꼬마의 은빛 머리칼을 꾹꾹 찔렀더니 그게 또 서러웠던지 울음소리가 점차 더 커지기 시작한다. 이런 젠장, 어쩌라고 짜샤! 팔을 찔러보기도 하고 코로 눌러보기도 했지만 꼬마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아, 혼미해진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어- 꼬마의 울음에는 최면효과라도 있는걸까. 혼미해지는 정신 너머로 보라빛 눈동자 한가득 투명한 액체를 떨구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울고있는 인간 꼬마가 보인다. 정말이지 그때 잠깐 미치기라도 한 걸까. 몸을 일으켜 꼬마의 목덜미를 덥썩 물고는 공중으로 내던져 등으로 받아낸 난 그때 미쳐있었 던게 분명하다. 영문도 모른 채 하늘로 내던져져 등위로 가뿐히 떨어져 내려야 했던 꼬마의 울음이 울먹거리며 멈출 기세가 보이자 살짝 이빨로 꼬마의 팔을 물어 목덜미에 강하게 내려놓자 엉겁결인듯 털가죽을 꾹 움켜쥐는 꼬마. 아파 임마. 살살잡아. 흑흑- 하는 소리와 함께 딸꾹질만 흘려내는 꼬마를 등위에 태운 채 몇 걸음 걷기 시작하자 맹맹해진 꼬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까르륵- 하고. 그러자 갑자기 뛰고 싶어졌다. 떨어지려나? 에라, 떨어질거 같으면 좀 더 꽉 잡겠지. 눈앞의 정원수를 지나쳐 잔디를 훌쩍 뛰어넘자 꺄악- 하는 비명을 내지른 꼬마가 덥썩 털을 부여잡는다. 그래, 그렇게 잡으라고- 안그러면 떨어져서 나한테 밟힌다? 네 다리를 이용해 빠르게 정원을 도약하며 달리기 시작하자 부들부들 떨며 털을 꼭 부여잡고 있던 꼬마의 근육이 풀리는 것이 느껴지더니 곧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비록 아직 코맹맹이 소리가 남아있긴 하지만. "꺄하하, 도라아~ 너무 재밌어!!" ..후후. 도라라고 부르지만 않았다면 내가 서비스 해줬을거다 임마. 인간의 잘못은 세치 혀라고도 하지, 응?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마력이 어느정도 회복되어간다. 마령초의 약효는 탁월한데에 비해 굉장히 늦게 효력이 나타나는것이 단점인지라 그리 많이 쓰이는 약초는 아니다. 뭐, 그걸 이런 상황에서 발견했었다는 것은 고마워해야할 일이지만 말이야. "도라아~ 오늘도 태워줘~" ...꼬마. 그 약초를 발견해낸 인간이 니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내 뱃속에 들어와 있었을거다. 흘끗 귀찮은 듯 귀를 파닥이며 고개를 돌리자 가정교사에게서 수업을 받고 돌아온 꼬마가 덥썩 목덜미에 매달리며 볼을 부벼댄다. 에라이, 이가 있으면 옮겨버렸을텐데 워낙 깔끔하신 이 몸인지라 이 따위는 없다. 조금은 아쉽네. 이제는 익숙하게 등에 올라타는 꼬마녀석. 영광으로 알아라, 마계 넘버원인 세투스라 님의 등에 올라타는게 어디 쉬운일인줄 아냐. 한숨과 함께 녀석을 등에 실은 채 몸을 일으키자 벌써부터 기대를 하는건지 꺄르륵 - 하는 웃음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진다. 꺄르륵..꺄르륵이라.. 내가 만약 이 꼬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꺄르륵' 이라는 웃음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무슨 웃음소리가 저렇단 말이냐. 터덜터덜 정원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흥에 겨운듯 꼬마놈이 등위에서 들썩인다. 하아, 그때 태우질 말았어야 했다. 태우질 말았어야 했어. 한 번으로 끝내려고 했더니 그 이후로는 태워줄때까지 미친듯 울어대는 꼬마 덕택에 이제 이놈을 태우고 정원을 도는 일이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있다. 저주할테다- 이 꼬마놈도 저주하고 이 왕성, 아니- 이 나라도 저주하고 신족놈들은 싸그리 전멸시켜 버릴테다! 이를 갈며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큰 연못 근처까지 와버렸다. 아, 오늘은 좀 오버했다.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던걸까. 꼬마놈의 방에서 꽤나 멀리 와 있었던지라 너무 생각에 잠겨있었던것인가, 중얼대며 몸을 돌리려니 왠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힐끗 귀를 세우고 그곳으로 눈을 돌렸더니 호수 주변의 나무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몇 명의 인간이 보인다. 뭐야, 이 근처에는 하인들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인치고는 너무 날렵한데. 멀뚱히 그 녀석들이 있는곳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답답했던지 꼬마놈이 칭얼대기 시작한다. "도라아~ 왜 안 움직이는거야, 여기가 낯선곳이라 그래? 음, 여긴 아바마마가 오지 말라고 한 곳이긴 하지만 도라랑 같이 왔다고 하면 이해해주실거야- 그니까 안심하고 움직여도 돼." 떼록떼록 굴러가는 보라색 눈동자가 말간 웃음을 보이며 휘어진다. 꼬마야, 왜 내가 너 때문에 여기 서 있는거라고 생각하는거냐? 거참 착각도 유분수네. 숲 너머의 인간들을 바라보던 눈을 떼어 흘낏 꼬마를 노려보아준 후 고개를 돌려 걸으려니 잠시 멈춘 채 움직이지 않던 인간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들. 뭔가 이상하다. 뒤돌아서 걷던 걸음을 멈춘 채 뒤를 돌아보았더니 꼬마녀석도 함께 뒤를 돌아본다. "왜? 뭐가 있는거야?" 그래, 굉장히 신경 거슬리는 것들이 대 여섯놈 있다. 심드렁히 꼬마를 씹고는 숲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잠시 미동없이 멈추어져 있던 놈들이 순간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쏴아아아 하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함께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놈들. 꼬마의 보라색 눈동자가 휘둥그래 떠졌다. "죽어라!!" 쏜살같이 달려든 맨 선두의 검은 옷 인간이 무언가를 흩뿌려내며 나무위로 점프하자 날카로운 단검이 우르르 나에게 쏟아진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이 꼬마놈에게 쏟아지는 거겠지. 가뿐하게 그 자리를 박차고 피해내자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푸른 날의 단검이 날아온다. 독이 발려진 단검이다. 슬쩍 고개를 숙여 피하려다 그렇게 되면 등위의 꼬마놈이 단검에 맞을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순간적으로 그 검의 손잡이를 입으로 낚아채어 버렸다. 그러는 와중 떠오르는 생각 하나. '이 녀석이 죽으면 난 자연스레 자유의 몸이 되지 않을까? 그럼 그냥 조용한 곳에서 심신을 가다듬으며 마력을 충족시킨 후 마계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옳거니, 바로 그거다. 꽤 괜찮은 생각이란 느낌에 씨익 웃음을 흘린 후 그 뒤로 던져오는 단검들을 슬쩍슬쩍 몇 센티 차이로 피해내었더니 등위에 올려진 꼬마놈의 작은 비명이 간간히 들려온다. "젠장, 덤벼!" 단검이 다 떨어졌나. 예의상 조금 피해준것 뿐인데도 그새 단검이 다 떨어졌는지 이제 놈들이 본격적으로 검을 집어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야 뭐 내 몸만 피해주면 그만이지. 한꺼번에 덥쳐 들어오는 여섯놈의 칼을 피하며 뒤로 뛰어올랐더니 목 부근의 털가죽을 꼭 쥐는 꼬마의 손이 느껴진다. 왠지 불편한 기분. 다음으로 덮쳐오는 검은 고개를 돌려 피해낸 후 검끝이 꼬마놈의 머리카락까지만 뻗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하며 꼬리를 이용해 몸을 고정시킨 순간, 등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이 꼬마를 향해 달려드는것이 느껴졌다. 나한테는 전혀 해가 없어 보이는 검이라 그냥 조용히 몸을 고정시킨 채 서 있었더니 곧 외마디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검에 꿰뚫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질척하게 등위로 쏟아져 내리는 피. 고개를 돌려 등위를 바라보자 등에 검은 꽂은 꼬마가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뜬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보라색 눈동자를 조용히 마주보아 주었더니 주르륵 흘러내리는 등 뒤의 피를 의식하지 못한 듯 꼬마가 생긋 웃음을 보인다. "..도망가." 그리고 풀썩. 모든게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꼬마는 칼을 맞았고 이제 곧 죽을것이며 나에게는 자유가 찾아올것이다. 그래,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 등위로 느껴지는 무거운 무게감과 질척하게 털을 뚫고 살가죽에 와닿는 따뜻한 피의 느낌이 이렇게 짜증스레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죽었나?" "아직 모른다, 확인사살을 해보아야.." "그러는 김에 늑대도 처리해라. 귀찮은 녀석이야." 멀뚱하니 앞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꼬마의 핏줄기를 보고 있으려니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는 인간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 누굴 처리하겠다고? 고개를 들자 긴 검을 쥔 채 다가오는 검은옷의 인간들이 보인다. 더러운 놈들. - 크르릉 이가 드러나고 그 사이로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짜증스럽다. 도망? 이봐, 꼬마. 나보고 도망을 가라고 했었나? 도망..도망이라. 어느정도 회복되어있던 마나를 확인한 후 다가오는 인간놈들을 노려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인간들. 과연 내 본모습으로 돌아갈 마력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뭐 어찌되었건간에, 너흰 다 죽었어. "아..아악, 사..살려주십쇼!!목숨만은..!" 정신을 차리자 이리저리 찢겨진 인간의 시체가 알아볼 수도 없을만큼 짓이겨져 주변에 널려있고 마지막 남은 인간놈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눈 앞에 엎드려 애원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기분 좋았을 피내음이 마음속 무언가를 뒤틀리게 만드는것을 느끼고는 왠지 두 팔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고개를 숙이자 창백해진 얼굴로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꼬마놈이 보였다. 살아있는건가? 고개를 숙여 심장으로 귀를 가져다 대었더니 미약하지만 아직은 뛰고있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 끈질기구나, 꼬마 너도. 나도 모르게 올라간 입가를 정리하며 정말이지 간만에 되돌아간 본 모습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다 고개를 들었더니 아직도 엎드려있는 인간이 보인다. 살고 싶은건가? 한심하긴. "누구냐." "살려만 주십시오, 마족이시여!!" 미간이 찡그려진다. 한 번에 말 알아듣지 못하는 놈들이 제일 짜증난단 말이야. "누구냐고- 암살 사주한 놈이 누구야?" 눈썹을 찡그린 채 물었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간놈이 냉큼 내뱉는다. "체..첸프리 백작입니다!!" 첸프리, 첸프리라. 뭐 기억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첸프리란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시킨뒤 인간놈을 향해 손을 뻗자 눈에뜨게 벌벌 떠는 것이 보였다. 그러게 누가 이몸에게 덤비라더냐? 손짓 한 번으로 간단하게 일그러져 터져 버리는 인간을 피해 한 곳으로 물러선 채 이제 어떻게 할까- 를 고민하고 있으려니 꼬마의 작은 손이 보였다.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 덥썩 잡아보았더니 한 손에 쏙 들어오고도 한참 남는 작은 손은 무척이나 차갑다. 맘에 들지 않는다. "쳇" 우선 꼬마놈을 안은 채 꼬마의 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손이 맘에 들지 않는 것 뿐이다. 아, 저 시체같이 하얀 얼굴도 맘에 들지 않아. 쏜살같이 꼬마를 본래 방 침대위에 올려놓은 후 마력을 이용해 상처를 치료시키자 어느정도 숨결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도 얼굴이 창백한것으로 보아하니 그리 크게 효험을 본 것 같진 않다. 귀찮은 꼬마라니까.. 슬쩍 주변을 훑어보며 마땅히 쓸만한것이 없나 찾아보다 결국 아무것도 발견해내지 못하고는 손톱으로 팔을 그어야 했다. 아 짜증나, 난 내 손으로 자해하는 취미는 없단 말이다. 살짝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득 쏟아져 내리는 피가 불만족스럽기도, 만족스럽기도 하다. 그만큼 내 손톱이 강하다는 것에 만족스럽고 또 그만큼 쏟아지는 피가 내 피라는 사실이 불만인것이다. 팔을 들어 꼬마의 입위로 올려놓았더니 반쯤 벌려진 입술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붉은 피가 꽤나 선정적이다. 마족의 피, 특히 고위 마족의 피는 독이자 생명수가 될 수 있다. 죽어가는 이가 마신다면 생명수, 건강한 자가 마시면 독. 마족의 피라면 무조건 독으로 치부하고 있는 인간놈들이 알게된다면 환장하고 덤빌 이야기이지만 - 귀찮은건 질색이니 비밀. 똑똑 흘러들어가는 피가 제대로 삼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감히 그 귀한 피를 줘도 못먹는다는 사실이 못마땅해 미간을 찌푸려야 했지만 뭐, 어쩔 수 없다. 꼬마는 약한 인간 꼬마인데다 지금은 의식을 잃은 상태니까. 팔의 상처에 입을 가져가 피를 한모금 머금은 채 혀로 대충 핥아주자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다. 아아, 아까운 피. 입에 머금어진 피를 확인한 후 꼬마에게 고개를 숙여 입술을 가져갔다. 순간 꼬마의 눈이 움찔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뭐 착각이겠지. 힘없이 벌려진 입술을 열어 입안의 피를 보내주었더니 멍하니 누워있던 꼬마가 쿨럭-하고 기침을 토해낸다. 안된다, 인간 꼬마. 기침으로 피가 튀어나오잖아 자식아! 몇방울 튀어나온 핏자국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제대로 삼켜내지 못하는 피를 확실히 삼킬 수 있도록 혀를 밀어넣자 작은 입이 파르르 떨려온다. 입안에 남아있는 피를 긁어모아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밀어넣어주었더니 약간의 기침과 함께 피를 꿀꺽 삼킨 꼬마녀석. 여러가지로 귀찮게 한다, 정말이지. 입술을 떼어 꼬마의 입 주변에 튄 핏방울 몇개를 핥아준 후 고개를 들자 어느새 안색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꼬마가 보였다. 아아, 역시 내 피는 만능이라니까.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은 후 힐끔 창밖을 바라보았더니 해가 지고 있다. 이쯤되면 하녀들이 들어올 시간이다. 이후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 힐끔 꼬마쪽을 바라본 후 마지막 서비스다 싶어 손을 들어주었다. "어이, 인간꼬마. 난 간다- 내 피를 먹은 놈인만큼 비실비실하게 살면 죽을 줄 알아라." 꼬마는 미동없이 침대에 누워있을뿐이다. 왠일로 웃지않는 통실한 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휙하니 창문을 벗어나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얼마만의 하늘인지 모르겠다- 하아, 이제 자유구나. ..아, 할 일이 하나 더 있었지. 첸프리, 첸프리라고 했던가? 씨익- 하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왕 서비스한거, 이것도 처리해주마, 꼬마. 마령초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세투스라님!! 이제야 오시다니요!!" "그간 뭘하고 지내신겁니까~" 마계로 돌아갔더니 놈들이 아우성이다. 그간 뭘 하고 지내다니? 늑대로 갇혀있던 치욕의 시간을 보낸 후 바로 마계로 돌아가기에는 뭔가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차원에서 놀다오던 참인데. 높은 빌딩숲과 황폐한 공기가 떠돌던 차원에서 보낸, 그런대로 색달랐던 일상을 떠올리던 세투스라의 사색을 가로막은것은 옛날 한때 총애했던 베니아였다. 매혹의 여왕이라는 이름답게 항상 노골적이고 짙은 화장으로 자신을 꾸미고 다녔던 여자인데도 오늘따라 거칠게 푸석푸석해진 피부가 의아스럽다. "당장! 지금 당장 인간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세투스라!!" 푸석푸석한 피부 위로 올록볼록 솟아오른 뾰루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새된 목소리로 베니아가 버럭 소리친다. 인간세상? 나 지금 막 돌아왔는데? "...무슨 소리야? 인간세상이라니."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 세투스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한겁니까!!" 멀뚱하니 되물은 나의 말을 기다렸다는 표독하게 일그러진 베니아의 얼굴이 바짝 다가온다. 화장이 사라진 베니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살기에 미간을 찌푸리려니 내가 없는 동안 수다만 하고 지냈던 것인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녀의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베론스 왕국의 왕제 제이닌 프로스톤이 미친듯이 당신을 찾고 있다구요!! 오, 세상에 그게 어딜봐서 인간이야!! 물론 보라색 눈동자와 은발의 외모도 인간답지 않은 미모지만 그 힘!! 오우 거를 한 방에 빈대떡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힘이 어딜봐서 인간의 힘이라는 겁니까!! 마치 고위 마족의 피라도 한사발 둘러마신것같은 그 인간이 얼마전 마계로 쳐들어왔습니다! 듣고 계세요? 믿어지세요? 인간이 마계로 쳐들어왔다구요!! 마계의 입구를 지키던 녀석들을 한 칼에 베어버리고 고위마족 다섯의 숨통을 끊어버린 괴물같은 인간이 한 말이 뭔지 아세요??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마족을 내놓으랍니다!! 흑발에 붉은 눈, 180에 달하는 키를 가진 마족이라면 당신밖에 더 있어요, 세투스라?!키가 모자라긴 해도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마족 하나를 그 인간에게 데려다줬다가 목졸려 죽을 뻔했습니다!! 정확히 당신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런대 세투스라 당신은 칠렐레 팔렐레 인간계로 나가더니 소식하나 없이 돌아오지도 않고- 저 미친괴물 인간은 계속해서 마계에 쳐들어와대고 - 마계가 무슨 빵가게라도 되는 줄 안답니까, 그 녀석?! 심심하면 들어와서 깽판치고 나가냐구요!!" ..쌓인게 많았나보다, 베니아. 숨을 몰아쉬며 헉헉대는 베니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더니 흑흑대는 울음이 들려온다. 오, 세상에 베니아가 울다니. 어지간했나보군, 그 인간. 그건 그렇고 하도 빨리 쏘아대는 베니아로 인해 제대로 전해듣지 못한 말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보라색 눈동자에 은발을 가진 미모의 인간이라는것. 어째 그 비슷한 인간을 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껏해야 십오년정도를 다녀온것 뿐인데도 기억이 나지 않다니- 이거 조금 충격이군그래. 그렇게 생각은 삼천포로, 몸은 이제 곡을 하는 베니아를 달래고 있는 와중에 품에 안겨진 베니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것이 느껴졌다. 응? 왜그래? 힐끔 품속의 베니아를 바라보자 새파랗게 질려 턱에 돋아난 뾰루지가 유독 돋보이게 된 베니아가 중얼거린다. "오..온다...온다.." ...베니아가 미치기라도 한 걸까. 덜덜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베니아를 심각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비명과 함께 내 어깨를 밀쳐낸 베니아가 소리질렀다. "왔어!! 그 미친 괴물 인간이 왔어!! 가!! 가, 이 빌어먹을 세투스라!!! 그 인간한테 가라고!! 당신은 오늘부터 우리 마계의 공마貢魔야! 공물로 바쳐버릴테다, 세투스라따위!!"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며 날 향해 팔을 휘두르는 베니아의 색다른 모습에 멍하니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 힘에 끌려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계의 입구에 와 있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거야? 공마? 누가, 내가? 누구한테? 어처구니 없는 이 상황에 멍하니 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으려니 개미새끼하나 보이지 않는 마계의 입구에 왠 기척이 느껴졌다.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며 힐끔 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 "...도라.." 마계의 붉은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머리는 넓은 어깨를 스치며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고 뭔가 반가운 듯, 놀라운 듯, 치켜떠진 보라색 눈동자는 평소에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을것이 분명 할만큼 날카로운 빛을 담고 있었다. 큰 키와 긴 팔 다리. 꽤나 수준있는 외모의 남자이기에 호오- 하는 눈빛을 보내다 조용히 입을 여는 놈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려버렸다. "..도라 맞지?" ......도라. 뭘 도냐. 내가 돌았냐? ... 그런데 어째 이런 패턴이 예전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천천히 다가오는 놈을 바라보다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가 묘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찡그렸다. 이놈, 인간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 속에 섞여있는 마족의 냄새는 뭐지? "..너-" 뭐하는 놈이냐? 라는 뒷말을 내뱉기도 전 덥썩 다가온 놈이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더니 대뜸 키스를 퍼붓기 시작한다. 으헉?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입술로 가로막고 혀로 봉인해버린 놈이 몇주 굶기라도 한 것 같이 남의 입술을 쪽쪽대기 시작했다. 어처구니 없음에 놈을 밀어내며 입술을 떼어내기도 해보았지만 찰거머리같이 달라붙는 그 입술에 이제 그냥 포기해버렸다. 쪽쪽 쭉쭉- 잘도 빨아대더 놈이 입술을 떼더니 덥썩, 날 안아온다. 이래뵈도 덩치가 꽤 크신 편인데 가뿐하게 안아오는 놈이라... 거, 맘에 안든다. "도라...도라...." 빌어먹을 자식아. 나 안돌았다니까? "야, 너 뭐야? 인간이야, 마족이야? 아니, 그것보다 너 나 알아?" 숨을 쉬기 힘들만큼 거세게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도라'라고 중얼대는 놈의 은색 머리칼을 빤히 바라보자 중얼거렸더니 놈이 끌어안은 자세를 풀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뭐라는 거냐, 이 자식? 연신 남의 뒷통수를 끌어안고 부비대며 머리칼에 키스를 퍼붓다 다시 얼굴로 옮겨와 이곳저곳에 입술을 들이대는 놈을 빤히 바라보다 이걸 패, 말어? 라고 고민해 보았지만 왠지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도라..도라.. 기다렸어, 너무 오래 기다렸어." 이리저리 부비대던 놈이 귓가를 입술로 쓸어내리며 안타깝게 중얼거린다. "그 날, 비몽사몽간이라 네 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검은 머리와 눈만 보아서 너무 안타까웠다. 남아있는건 입술위의 키스뿐이라 그게 더 안타까웠어. 다음 날 서큐버스에게 정력을 빨려 순식 간에 늙어버린 첸프리 백작이 아니었다면 난 널 찾을 수 없었을거야...도라.."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입술위의 키스. 얼마나 문질러대었는지 얼굴이 따끔거릴 지경이다. "..첸프리? 그놈이 뭘 어쨌길래?"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마족이 밤에 찾아와 말했다더군 '니놈 때문에 내 피로 꼬마를 살려야 했다며- 대신 자유를 얻었으니 마계로 돌아가기전 보답하기 위해 이렇게 들렀다' 라고. 마족이라도 마계에 살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니까...하아, 마계에 쳐들어가길 잘했어.." 슬슬 기억이 날듯 말듯 하기도 하다. 피로 인간 꼬마를 살린적이 있긴 하다. 근데 그 인간꼬마는- 힐끔 떨리는 눈으로 볼에 키스를 해오는 놈을 바라보자 날카로운 보라색 눈동자와 물결같은 은색 머리칼이 시야를 뒤덮듯 흘러내려왔다. ..색이 똑같긴 해도 동글동글 애교많은, 그니까.. 내 허벅지까지밖에 오지않던 꼬마였는데.. 힐끔 날 안고있는 놈의 어깨를 보았더니 나보다 조금 더 높거나, 비슷하거나 둘 중 하나다. "..너.... 그 인간 꼬마냐?" "아아, 도라.." 미심쩍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떨떠름하게 물었더니 무어가 그리 감격스러운지 놈이 입술을 맞대며 부비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부비댐이 다시금 끈적끈적하게 혀를 몰고 다가왔지만 말이다.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크다니. 역시 인간은 빨리 자라고 빨리 죽는다. 혀를 맞대며 내리감긴 속눈썹을 힐끔 바라보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분으로 놈의 뒷통수를 쓰다듬어주자 허리를 감은 놈의 팔에 한층 더 힘이 가해진다. 뭐 다른 차원에서 돌아오자마자 본의아니게 인간세상으로 튀어나왔지만- 지루한것 보다야 낫잖아. "보고싶었어, 너무나 보고싶었다.." 입술을 떼어내 목덜미에 부비대기 시작하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나한테 이렇게 입술 부비대는거 보면 설마-" 설마? 하는 눈으로 녀석을 마주보아주었더니 몽환적인 눈빛으로 목덜미를 헤집던 놈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다. 날카로운 턱선 아래로 이어진 목덜미가 잠시 위아래로 움직임을 보이더니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늑대시절에도 깔았는데 지금도 못깔것 같아?" 빌어먹을, 나 갈거다. 놔라 이 잡인간아! 휙하니 뒤돌아서 마계 입구로 뛰어들려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는건 결코 날 끌어안고 있는 놈의 힘이 예상외로 상당해 뿌리칠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냥, 그냥 그러고 싶었던거다. "..진짜 이름은 뭐야, 도라?" 목덜미에 쏟아지는 입술이 기분나쁘지 않으니까, 뭐 - 일단 합격점. "마계의 넘버원 세투스라 님이시다." 그에따라 들리는 웃음소리도 허스키하니 마음에 드니 뭐, 일단 합격점. "알아서 모셔라, 잡인간 제인." "-- 성심껏 모셔드리지요 세투스라."